15. 건강 보험 제도의 기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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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학

15. 건강 보험 제도의 기본 성격

by 오스카 리 2022.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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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동안 아무 병에도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행운을 타고 태어난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병에 걸려 고생하기 마련이다. 병 그 자체가 주는 고통도 문제려니와 치료에 드는 막대한 비용 역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요즘처럼 의료비가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의료비 부담은 서민들의 삶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위험은 민간 부문의 보험에 의해 어느 정도 대처가 가능하다. 그러나 보험료 그 자체가 만만치 않은 수준이어서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 많다. 합리적으로 판단하면, 부담됨에도 불구하고 의료보험에 가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당장 먹고살기가 바쁘다고 느끼는 사람은 나중에 무른 일이 생길지언정 감히 보험에 가입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료비 부담과 관련된 위험에 대해 개인이 스스로의 책임하에 알아서 대처하도록 놓아두면 수많은 사람이 보험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이 문제와 관련해서 정부가 어느 방식으로든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세계 주요국 중 정부가 전혀 개입하지 않고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에 내맡기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거의 모든 나라들의 의료보장제도를 통해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의료비 부담 문제의 사회적 해결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이 문제에 개입하는 정도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로 개입하느냐에 따라 의료보장제도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얼마 전까지 미국이 채택하고 있던 민간보험방식으로, 정부의 개입이 최소한으로 제한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 방식하에서 의료보험에 가입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책임하에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직장에서 고용과 동시에 의료보험이 제공되기 때문에 직장을 가진 사람은 자동으로 의료보험에 가입하게 된다. 문제는 직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인데, 이들 중 빈곤층과 노년층에 대해서는 정부가 별도의 의료보장 혜택을 제공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빈곤층을 대상으로 1965년부터 Medicaid 프로그램이란 무료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해 오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수혜자는 일정한 범위 안의 의료서비스를 무료로 제공 받게 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의료서비스라는 현물의 형태로 지급되는 대 빈곤층 보조 정책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65세 이상의 노인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Medicare라는 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되고 있다. 역시 1965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사회보험세가 주요 재원이며, 아주 작은 비중이지만 본인의 부담도 재원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비록 Medicaid와 Medicare 프로그램으로 보완했다고 하지만, 미국 사회에는 상당한 숫자의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보험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진보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적 의료보험제도의 도입이 시급하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그러나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과 이익집단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공적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이 온갖 어려움을 헤치고 공적 의료보험제도의 도입에 성공했으나, 일부에서는 반쪽짜리 성공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의회 통과과정에서 반대파를 무마하기 위해 많은 양보를 해야 했을 뿐 아니라 반대파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제도의 정착에 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유형은 사회보험방식으로, 전 국민을 상대로 한 공적 의료보험제도가 그 기본 틀을 구성하고 있다. 국가가 의료보장에 대한 기본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에서 공적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고 정부가 그 비용의 일부를 부담하는 체제다. 이 공적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고 정부가 그 비용의 일부를 부담하는 체제다. 이 공적 의료보험제도는 민간의 보험회사들이 제공하던 의료보험을 정부가 통합해 운영하는 하나의 거대한 보험 프로그램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국민이 낸 보험료가 공적 의료보험제도의 주요한 재원이 된다. 우리나라를 위시해 독일, 일본, 프랑스 등 대부분의 나라들이 바로 이 사회보험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미국도 최근의 개혁 작업을 통해 부분적이나마 사회보험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다.

의료보험을 민간부문에 내맡기지 않고 정부가 개입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앞에서 본 국민연금제도와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시장실패의 보완을 한 이유로 들 수 있는데, 모든 국민이 아무런 제약 없이 가입할 수 있는 의료보험상품이 제공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시장실패가 일어날 수 있다. 보험회사들이 역선택 문제의 발생을 우려해 여러 가지 제약을 가해 놓기 때문인데, 국민이 모두 가입하는 공적 의료보험제도를 통해 역선택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또한 소득재분배와 온정적 간섭주의의 관점에서 공적 의료보험제도의 의의를 찾을 수도 있다. 제1절에서 말한 상품 평등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국민이 적절한 의료서비스의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민간의 보험회사가 의료보험을 제공하는 체제하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공적 의료보험은 각자가 소득의 일정부분을 보험료로 납입하고 똑같은 혜택을 받도록 만들어 가난한 사람도 적절한 의료서비스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와 동시에 온정적 간섭주의의 관점에서, 근시안적 태도로 인해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공적 의료보험제도가 필요하다는 이유도 들 수 있다. 의료보험에 가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장의 소비를 줄이기 싫어 가입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소비자주권을 극도로 신봉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근시안적 행동을 막기 위해 모든 국민이 강제적으로 가입하게 한 공적 의료보험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논리에 구태여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세 번째 유형은 국민보건서비스 방식으로, 지금 보고 있는 세 가지 유형 중 정부 개입의 정도가 가장 강한 체제다. 의료보장은 전적으로 국가의 책임이라는 취지에서 모든 국민에게 무상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이 방식의 특징이다. 이에 드는 비용은 정부의 일반적인 세입으로 충당되고 있기 때문에 엄밀하게 따지면 보험 프로그램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없고, 의료보장을 제공하는 일반적인 지출 프로그램의 일종이라고 보아야 한다. 모든 국민에게 포괄적이며 균등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상품 평등주의의 이상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 방식이다.

영국, 스웨덴, 이탈리아 같은 나라가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이 나라들에서는 의료기관이 대부분 국영 혹은 공영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정부가 의료서비스 공급 체계에 직접적인 통제를 가하는 셈이어서 의료비의 급격한 상승을 막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모든 국민에게 획일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해 다양한 선호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 방식이 갖는 주요한 단점이다. 비싼 돈을 지불하더라도 좋은 질의 의료서비스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이 방식 하에서는 그런 사람의 바람을 충족시켜 주기가 어렵다.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제도는 두 번째 유형, 즉 사회보험방식에 기초해 있다. 국민보건서비스 방식처럼 강력한 개입 방식을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전의 미국처럼 민간부문의 자율에 전적으로 내맡기지는 않는 절충적 방식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건강보험제도가 갖는 기본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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