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국민건강보험제도는 1977년 7월, 5백명 이상의 사업장을 대상으로 의료보험을 제공함으로써 그 첫발을 내디뎠다. 1989년 7월에 도시자영업자에게도 지역 의료보험을 확대 실시함으로써 전 국민 의료보험을 달성했고, 1999년 2월에는 국민건강보험법을 제정해 직장 의료보험과 지역 의료보험을 통합함으로써 단일보험체계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국민연금제도보다 약 10년가량 더 긴 역사를 가진 셈이다.
국민건강보험제도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성숙한 단계로 진입해 우리나라의 의료 보장체제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보장 체제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그 수준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에는 1인당 의료비 지출이 OECD 평균의 두 배 이상 되는 고비용 구조이면서도 평균 기대수명이나 유아 사망률의 측면에서 별로 나을 것도 없는 부진한 성과를 보인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의료비 지출 대신 성과는 훨씬 더 좋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국민건강보험제도의 역할을 꼽을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전 국민이 건강보험 아니면 의료급여의 혜택을 받고 있어 거의 완벽한 의료보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의료급여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정부가 기본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으로서 공공부조 정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2014년 현재 건강보험에 가입된 사람의 숫자는 5,032만 명이며, 의료급여의 혜택을 받는 사람의 숫자는 144만 명에 이른다.
2015년 현재 직장가입자의 보험료율은 6.07%인데, 가입자 자신과 고용주가 각각 절반씩 납부하게 되어 있다. 즉 가입자가 보수월액의 3.035%, 그리고 고용주가 나머지 3.035%를 나누어서 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건강보험료의 경우도 앞에서 본 국민연금 보험료의 경우와 비슷하게 보수월액 7,810만원 이하 부분에만 부과되고 있다. 따라서 보수월액이 아무리 크더라도 월 237만원 이상의 보험료는 내지 않게 된다. 국민연금의 경우보다는 보험료 부과의 상한선이 더 높지만, 일정한 상한선이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것을 볼 수 있다.
건강보험제도를 운영하는 OECD의 주요 나라들과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의 6.07%라는 보험료율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보험료율이 이렇게 낮은 데다가 정부 지원의 규모도 별로 크지 않기 때문에 보장률, 즉 총진료비 중 건강보험료에서 지급하는 비율도 자연히 낮을 수밖에 없다. 2013년 현재 우리나라 건강보험의 보장률은 62.0% 수준인데, 70%에서 80% 수준에 이르고 있는 선진국의 보장률에 비해 상당히 낮은 편이다. 우리나라의 국민건강보험제도는 기본적으로 '저부담 저급여' 체제를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건강보험의 보장성 정도를 파악하는 또 다른 지표로 국민 의료비 지출 중 공공의료비 지출의 비율을 따져볼 수 있다. 2013년 현재의 비율을 보면 OECD 평균이 72.7%인 데 비해 우리나라는 고작 55.9%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특히 영국의 86.6%나 스웨덴의 84.1%에 비하면 훨씬 더 낮은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우 개인의 의료비 지출이 그만큼 많다는 뜻으로, 국민건강보험제도의 개혁에 관한 논의에서 보장성 강화라는 과제가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최근 정부는 2014~2018 건강보험 중기보장성 강화 계획을 통해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추가로 필요한 재정지출이 약 7조 4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정부의 지원을 늘리거나 가입자의 보험료 부담을 높이지 않고서는 건강보험의 재정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보장성을 강화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더군다나 인구 고령화로 인해 의료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전반적으로 늘어날 것이 분명한데, 그렇게 되면 보장성 강화는 더욱 실현하기 어려운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건강보험제도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의료서비스에 대한 과다 수요로 인해 건강보험에 대한 재정 압박이 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입자 입장에서 보면 의료비 중 일부만을 자신이 부담하기 때문에 조금만 아파도 병원을 찾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다. 일종의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는 셈인데, 이에 따라 건강보험 재원이 낭비되는 결과가 빚어지게 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전 국민 주치의제도'가 고려되고 있는데, 주치의가 1차 진료 과정에서 상급병원으로 갈 필요가 있는지를 심사함으로써 불필요한 병원 이용을 막자는 취지를 갖고 있다.
이와 동시에 의료서비스의 공급 측면에서도 재정 압박의 요인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의료인이 수가를 올리기 위해 과잉 진료를 하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현재 많은 질병에 대해 적용되고 있는 행위별 수가제하에서는 치료가 모두 끝날 때까지 의료인이 제공한 진료행위 하나하나에 대해 일정한 의료비를 지급하게 된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환자들로서는 의사들의 권하는 의료 처치가 정말로 필요한지의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워 그대로 따를 수 밖에는 없는 처지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별 수가제하에서는 의사들이 꼭 필요하지 않은 검사나 주사 등을 통해 수가를 올려 받을 유인이 존재한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우리나라는 2012년부터 몇 가지 질병에 대해 포괄수가제를 도입한 바 있다. 이 제도하에서는 질병별로 미리 정해진 금액의 진료비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진료 행위가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포괄수가제 도입 당시에도 지적되었듯, 이 제도에 따르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포괄수가제하에서는 질병에 따라 일정한 진료비만 받게 되므로 제공되는 의료 서비스의 질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문제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필요한 의료 처치임에도 불구하고 비용 절감을 위해 이를 제공하지 않는 과소진료의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포괄수가제가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 상태로는 이 제도의 효과에 대해 명확한 평가를 하기 어렵지만, 만약 이런 문제가 실제로 일어난다면 적절한 보완 조치가 시급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최근 정부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영리병원 도입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결론지어지는지에 따라 건강보험제도에도 영향을 올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는 의료인과 비영리법인만이 의료기관을 설립할 수 있는데 비해, 영리병원이 도입되면 비의료인과 영리법인도 의료기관을 설립할 수 있게 된다. 경제 관련 부처는 '서비스산업 선진화 방안'의 일환으로 영리병원 도입을 추진해 왔다. 투자개방형 의료법인의 설립을 허용함으로써 의료서비스의 질을 향상하고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근거에서 이 정책을 추진해 왔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영리병원을 허용해 경쟁을 촉진하는 것이 의료서비스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공공적인 성격이 강한 의료시장을 이윤추구의 장으로 개방하는 데 따르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예상되기 때문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영리병원은 이윤 창출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윤을 늘리기 위한 적극적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순수한 경제 논리로만 따져 볼 때 영리병원의 도입이나 당연지정제 폐지가 나름대로 장점을 갖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순수한 경제 논리에 의해서만 정책을 운용할 수는 없다. 현실적 여건에 따라 이론이 말하는 바와는 다른 결과가 빚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현재 우리나라 의료시장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시급한 해결을 필요로 한다면 급격한 변화를 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아 지금 우리 국민은 비교적 낮은 비용으로 좋은 의료서비스를 받고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우리나라 의료시장의 상황은 미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에 비해 오히려 더 낫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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