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제도는 기본적으로 정부가 강제저축을 통해 국민의 노후 생계를 보장해 주는 보편적 연금 프로그램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여러 가지 사회보험제도 중 가장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중요성도 큰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제도가 어떤 논리적 근거 위에서 그 존재 이유를 갖는지 살펴보기 위해, 우선 다음과 같은 단순한 모형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 보기로 한다. 이 모형을 통해 국민연금제도가 사회 후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본 다음, 이 제도가 갖는 의의를 좀 더 구체적인 차원에서 설명하기로 하겠다.
중복세대의 모형
다음과 같이 매우 단순화된 경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경제에는 기간마다 n명씩의 사람이 태어나고 있으며, 각 사람은 두 기간에 걸쳐 생존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므로 어느 한 시점에서 보면 2n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중 n명은 젊은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이고 나머지 n명은 나이 든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각 사람은 2단위의 소비 가능한 자원을 갖고 태어나는데, 이것은 바로 그 기간에서만 소비할 수 있을 뿐 다음 기간으로 넘겨 소비할 수 없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보는 모형은 젊은 세대에 속하는 사람과 나이 든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 중복되어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중복세대의 모형이라고 불린다. 이 모형은 새무엘슨이 처음 제시한 이래 경제학의 여러 분야에서 널리 응용되어 왔다. 예를 들을 이 모형은 화폐가 갖는 본질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 활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국채의 발행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데도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이 모형에 특히 관심을 갖는 이유는 지금 논의하려는 국민연금제도의 논리적 근거를 바로 이 모형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경제에서 자원배분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인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선 생각할 수 있는 하나의 균형상태는 각자가 태어날 때 갖고 나온 자원, 즉 2단위씩의 초기부존자원을 모두 생애의 제1기에 소비하는 것이다. 이 자원배분의 상태가 실현할 수 있는 균형임은 분명하지만 파레토효율적이지는 못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다른 방식으로 자원을 배분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후생이 증진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고려하려는 새로운 자원배분의 상태는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 사이의 사회적 계약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그것은 현재 젊은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 초기부존자원 2단위 중 1단위를 나이 든 세대에 속하는 사람에게 이전하고, 그 대신 다음 기간에서 그때의 젊은 세대에게 1단위의 자원을 이전받기로 한다는 사회적인 약속이다. 이 사회적 계약을 통해 이제 모든 사람이 생애의 제1기와 제2기에 각각 1단위씩의 자원을 소비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각자가 두기에 걸쳐 고르게 소비할 수 있는 자원배분 상태는 조금 전에 보았던 상태, 즉 각자가 초기부존자원 2단위를 모두 생애의 제1기에 소비하고 제2기에서는 아무것도 소비하지 못하는 상태보다 명백하게 더 우월하다. 자원을 소비할 때 나오는 한계효용이 체감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각 기에서 1단위씩 소비할 때의 효용이 한 기에서만 2단위를 모두 소비할 떄의 효용보다 더 크게 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회적 계약을 통해 모든 사람의 후생이 증진될 수 있는데, 국민연금 제도는 이 사회적 계약을 구체화 시킨 제도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이 제도가 갖는 당위성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중복세대의 모형은 이 제도의 요체가 세대 사이에서 자원을 이전함으로써 사회 후생을 증진하자는 약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국민연금제도의 의의
일반적으로 정부의 재정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기능의 측면에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1) 재정수입 달성
(2) 시장실패의 보완
(3) 소득 재분배
(4) 온정적 간섭주의에 의한 개입
이와 같은 일반적 틀을 국민연금제도의 경우에 적용해 이 제도가 네 가지 기능의 측면에서 어떤 의의를 갖는지 평가해 보기로 하자.
우선 재정수입의 달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국민연금제도는 이 기능과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국민연금제도가 성숙한 단계에 이르면 보험료 수입보다 연금 지출이 훨씬 더 많아져 오히려 다른 데서 재원을 끌어다 써야 할 상황이 된다.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나라에서 이와 같은 일반적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예외적으로 제도의 초기 단계에서는 수입이 지출보다 더 클 수 있지만, 그 초과액은 나중에 사람들이 노후를 맞았을 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보통 말하는 재정수입으로 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국민연금제도에서 재정수입 달성을 위한 수단이라는 의미는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아래에서는 나머지 세 가지 기능의 측면에서 국민연금제도의 성격을 분석해 보기로 하겠다.
시장 실패의 보완
국민연금제도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시장실패를 보완해 준다는 점에서 그 정당성의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우선 노후의 생계를 위해 저축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실질 가치의 측면에서 안전한 투자 기회 혹은 연금 상품이 제공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장실패가 일어날 수 있다. 이 시장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국민연금제도를 도입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 제도의 도입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태여 국민연금제도 같은 대규모 프로그램을 마련하지 않더라도 물가 연동 공채를 발행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다음에 설명할 두 번째 유형의 시장실패는 보편적인 연금제도의 도입을 통해서만 적절한 대처가 가능하다. 그것은 사람마다 현역에서 일할 수 있는 기간이 다른 데 따르는 위험성을 대상으로 하는 보험상품이 없다는 뜻에서의 시장실패다.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은퇴해야 할 사정이 있는 사람은 더 적은 저축으로 더 오랜 은퇴 기간을 생활해야 하는 위험을 안게 된다. 이와 같은 위험이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지만, 민간부문의 보험회사는 이에 대해 적절한 보험을 제공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보험회사가 이런 위험에 대비한 상품을 내놓을 수 없는 이유로 역선택과 도덕적 해이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역선택의 문제는 다른 사람보다 더 일찍 은퇴하게 될 사람들만 앞다투어 보험에 가입하고, 남보다 더 늦게 은퇴할 사람들은 가입을 꺼리게 되는 경향에서 나온다. 역선택 현상에 직면한 보험회사가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보험료를 올리면 문제는 한층 더 심각해진다. 이제는 아주 빠른 시기에 은퇴할 것이 확실한 사람만 보험 가입을 원하게 되어 역선택 현상이 더욱 심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해이의 문제는 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이 충분히 일할 수 있음에서 불구하고 보험을 믿고 일찍 은퇴해 버리는 데서 발생한다. 보험회사가 각 보험가입자의 노동 가능성 여부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면 이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나, 개인의 신상에 관해 그 정도로 소상하게 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민간 부문의 보험회사로서의 이와 같은 역선택이나 도덕적 해이의 문제를 감당하기 힘들다.
정보경제이론에서는 역선택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가 사람들을 단체보험에 가입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해답을 찾아 놓고 있다. 모든 국민이 국민연금제도의 적용을 받게 만든다면 일찍 은퇴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만 가입하는 역선택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덕적 해이의 문제는 국민연금제도를 도입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만족할 만한 해결을 기대하기 힘들다. 이 제도하에서도 충분히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일찍 은퇴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도의 정비를 통해 이 현상을 최대한으로 억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두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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